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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장군 생가 비문 소개(House of General Jae-yeon Eo's Birth)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수비의 책임자로서 싸우다 순절한 장군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이 태어나 살던 조선 후기의 살림집이다.
 

이 집은 야산 기슭에 북서향으로 위치하였는데, 넓은 바깥 마당에 면하여 一자형 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서 전체적으로는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광채의 끝부분에 위치한 대문은 6칸 규모의 초가인데, 사랑방과 대청 앞뒤에 개방된 퇴칸이 있으며, 동쪽에는 4칸 규모의 헛간채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7칸 규모의 초가로서 건넌방과 대청,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었고, 안방 앞에서 초가로서 건넌방과 대청,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었고, 안방 앞에서 꺾이어 부엌과 광이 있다.

구조는 3량으로 간단하지만 대들보와 기둥의 치목 수법이 우수하다.

광채는 8칸 규모의 초가로 4칸 광과 2칸의 고방, 대문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채와 달리 측면이 2칸인 양통집(겹집)의 평면규모를 보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안채는 현종 1년(1660)에 건립되었고, 사랑채와 헛간채, 광채는 모두 19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리

 

충장사는 조선 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진무중군 겸 수성장토포사로 강화도 광성진을 지키다가 순절한 어재연ㆍ재순 형제 비장 이현항, 광성진 별장 박치성, 어영초관 유풍로, 강화진무영천총 김현경, 서사 임지팽등 7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어재연의 자는 성우, 본관은 함종으로 순조 23년(1823) 태어났다.

헌종 7년(184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주부ㆍ용양위호군ㆍ공충도별마절도사를 거쳐 고종 3년(1866)병인양요 때는 우선봉으로 강화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고종 8년(1871)에는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내다 4월 광성진을 수비하던 중 23일 미국군과 치열한 백병전 끝에 53명의 장병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해 8월과9월 조정에서 충신정문이 하사되었다.

현재의 사당은 1974년 4월 준공되어 매년 음력 3ㆍ9월 인근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제향되고 있으며, 이곳(사당)에서는 서양세력을 물리친 선현의 뜻을 기려 서양력을 비롯한 서양 물건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어재연(魚在淵)장군은 근세 조선 말기 구미 열강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을때 서해안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이천의 별 이다.

장군의 본관(本貫)은 함종(咸從)이며 자(字)는 성우(聖禹)로 1823년 2월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서 어용인(魚用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장단· 회령부사 등을 거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강화영(江華營)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침공해 온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당시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당시 조선군 243명이 전사한 치열한 전투의 주역인 어재연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격분한 민중들에 의해 불살라진데 있었다.

셔어먼호의 행방을 탐문하다가 사건의 윤곽을 알게된 미국의 브란트대통령은 청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에게 셔어먼호사건에 대한 책임문책과 조선과의 통상체결의 임무를 명하였으며 이에 로우공사가 직접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기함 콜로라도호와 군함 4척에 1천 1백 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하니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다.

 

그러나 통상 체결 요구에 대해 우리측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강화도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서다가 허가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퇴각해 간 일이 생겼다.

 

평화적인 교섭의 어려움을 안 로저스 제독은 마침내 명령을 내려 4월 23일 615명의 병력을 몰래 초지포(草芝浦)에 상륙시켜 기회를 엿보다가, 이튿날인 4월 24일 바다로부터 쏘아대는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어재연장군이 포진하고 있는 광성포대를 습격하니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고, 광성별장 박치성(朴致誠)은 어재연장군의 용감한 죽음을 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전사하였으며, 천총 김현경(金鉉景), 초관 유풍노(柳豊魯), 군관 이현학(李玄鶴)등 수백명의 조선군 장졸이 침입자들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한미수교 1백년사에 있어 오직 한번뿐인 이 전투는 그후 미국측이 부평부사 이기조(李基祖)에게 "외국사신을 배척함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물러감으로서 막을 내렸지만, 당시의 집권자인 대원군의 서양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그의 쇄국정치를 더욱 강화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키고저한 어재연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라는 높은 벼슬을 더해 주었다.

지금도 강화도에 있는 장군의 묘와 장군이 전사한 광성진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율면 산성1리에 있는 장군이 태어난 생가 역시 이천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으며, 지난 1973년에는 생가 언덕위에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을 짓고 충장사(忠壯祠)라 이름하였으며 최근에는 생가(生家)를 대폭 보수하고 그 앞의 하천을 말끔히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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