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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율면 본죽리(栗面 本竹里)

 

현재 일실4효 정려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일실사효 정려에 소장하였던 현판 3개가 율면 본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門前)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改築) 당시 그 정문(旌門)을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 동생인 김석(金錫), 김구(金銶), 이들의 누이동생 등 4남매의 효행(孝行)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金銑)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겸사(按兼使)를 지낸후 벼슬 하지아니하고 청주(淸州)에 은둔한 김사겸(金士兼)의 11대손 광국공신 화산군 김주(光國功臣 化山君 金澍)의 현손이다.

김기창(金起昌)씨의 군지편찬(郡誌編纂) 자료(資料)에 의하면 김선(金銑)은 안동인(安東人)으로 문서공(文瑞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蘇生)하게 되어 그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조 30년(1753)에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되어 영조대왕의 친필(親筆)로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賜額) 하였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4명의 효자가 난 것을 기리는 추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행의 근원이며 모든 나라가 따라야 할 것은 오로지 효(孝)이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 지평공은 천성이 순하고 효심이 깊어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기뻐하시면 지평공도 기뻐하였고, 부모님이 근심하시면 지평공도 근심하였다. 공께서 어른이 되어서는 진실로 효도하고 봉양함이 더욱 돈독하여 반드시 뜻과 힘을 다하였다.

공의 모친이 여러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김구, 김석 그리고 열 살이 넘은 누이동생과 함께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다려드렸다. 그 정성이 대단히 지극하여 공께서 먼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회복하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 또 위독해지자 공의 동생과 누이동생이 차례대로 공과 같이 손가락을 잘라 공의 모친이 소생하여 며칠 동안 더 연명하였다.

모친의 장례를 지냄에 있어서는 예제에 따랐는데, 이 형제분들의 얼굴이 수척하였고 돌아가신 것을 매우 슬퍼하고 울음소리가 애절하여 조문하는 사람들이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후에는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서 날마다 모친의 묘소에 참배하고 3년동안 죽을 먹어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부친께서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을 것을 권하여 어머님을 그리는 정을 진정시키고 그 말씀에 따라 고조할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고조할아버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효를 다하였으며 돌아가시자 슬퍼함을 다하였으니, 모친상과 부친상이 한결같이 애절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다.

 

아아!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4남매의 지극한 효를 다한 행적은 여지병풍과 읍지에 기록되었으며, 같은 고을에 사는 선비가 이러한 사실을 이천군에 알리고, 이천군에서는 경기감영에 보고하고, 경기감영에서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현종 10년(1669)에 4남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혜가 내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영종 30년(1754)에는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一室之四孝』라 하였다.

효자·효녀가 어찌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4남매의 효자는 옛날부터 드물었는데 여기 김씨 4남매의 효행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지평공의 고조할아버지 문단공은 시와 예의 교훈을 잘 익혀서 도의를 드러내는 근거로 삼았으므로 학문과 뜻과 행동이 세상에 추앙받는 바 되었다.

그래서 그 공로는 우리 가문을 보존하였고 충훈부에 그 이름이 올랐다.

공의 할아버지 부사공은 광해군때를 당하여 홀로 대의를 지켰으며, 더럽지 않은 절개를 세워 지극히 돈독하였다.

이어 4남매의 독실한 효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충(부사공의 충을 말함)과 효(지평공의 효행을 말함)는 우리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다.

 

아아! 할아버지께서는 그 부모님의 장례를 치룰때는 슬픔을 머금고 그 애통함을 참으셨으니, 효도해야한다는 것을 고칠수 없는 뜻으로 아신 것이며, 혹시나 선조의 뜻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으니, 이 어찌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선인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아버지께서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선조들의 효행이 점차 잊혀져서 나타내지 못하게 될 것을 매우 걱정하였다.

이에 이러한 간절한 말을 국왕에게 상언하여 여러 대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4효자의 효행의 빛을 드러내게 되었고, 현종과 영조 두 임금의 영광스런 은전을 입게 되었다.

이는 실로 우리 부친께서 지극한 뜻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필연적인 결과로 효자 정려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시에는 미쳐 틈을 내지 못하여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하셨다.

그래서 이 못난 증손자가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가하여 여러 형제·자식들과 더불어 정려 짓기를 의논하여 그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이에 감히 "우리 선조의 뜻을 계승하였다."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의 4남매의 효행은 여러 고을의 모범이 되며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씨 집안의 효행은 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있었다고 그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라고 발문을 적었다.
 

<賜額內容>
孝子 贈 通德郞 司憲府持平 金銑 贈 朝散大夫司憲府持平 金銶 贈 通訓大夫 司憲府持平 行果毅 四山監役 金錫 孝女監役 李明三妻 金氏四男妹 之門 英宗甲戊七月 日 ?命 旌閭
 

(해설)
효자로 통덕랑(정5품) 사헌부지평에 증직된 김선, 조산대부(종4품) 사헌지부평에 증직된 김구와, 통훈대부(정3품) 사헌부지평 행과의 사산감역에 증직된 김석과, 효녀이므로 감역에 증직된 이명삼의 처 등 김씨 4남매 의 정려문이다.

김씨 4남매의 효행을 기려 영조 30년(1754)에 명정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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